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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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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일반적 존재로 여겨지지 않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상들은 거절, 혹은 특별한 환영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들은 일상적인 환대를 경험하지 못하기에 주로 기피, 거부의 시선을 받아내는 맥락 속에 살아가고, 특별히 환영되는 시혜적 반응들에 엮여진다.

특정 집단에 대한 접근의 통제 및 규제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누군가 그 집단들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고 허락하는 행위를 특별화 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해주는 것마냥 착한 지배층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스키즈존’도 그렇다. 애초에 ‘예스키즈존’이라며 어린이의 접근을 허락하고 수용한다는 말은 ‘노키즈존’이라는 다른 항의 유표로서만 가치를 갖는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있기에 ‘예스키즈존’이 성립되는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공간의 접근권을 막는 문화가 없는 곳에서 어린이가 접근 가능한 공간에 대해 굳이 ‘예스키즈존’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그것도 ‘허락한다면서’ 말이다. 이는 ‘예스어덜트존’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으른은 공간에 대한 접근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굳이 출입 가능을 통보받지 않으며, 그렇기에 ‘허락’(시혜) 받을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접근 금지가 혐오이듯, 특정 대상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는 말들 역시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승낙이라는 시혜적 감성이 전제된 언어 및 문화는 계속해서 대상이 예속적 존재로 있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이 있으니 예스키즈존은 어린이 접근 가능성을 알리는 것 아니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이어야지 “우리는 너네가 들어오는 걸 허락해줄게”라는 차원이 되어선 안된다.

접근을 허락받는 대상은 불허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렇기에 노키즈존의 해결은 예스키즈존이 아니라 노키즈존을 없애는 것이다. 어린이의 공간 접근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노키즈존 이후의 ‘예스키즈존’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예스키즈존’을 외치며 본인들이 특별히 어린이와 ‘공존’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착한 으른 뽕에 취해있는 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어린이는 으으른의 선의 속에 공존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존재로, 사회 속에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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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두둥 ( ͡° ͜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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