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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반도>를 중심적으로 비판하고, 중간에 <# 살아있다>를 끼워서 같이 비판함.



최근 개봉한 한국 좀비 영화 <# 살아있다>, <반도> 모두 봤고, 보는 동안 침잠하게 있고 싶었지만 좆같은 기분을 씻을 수 없어 결제한 스스로를 탓하며 상영 중에 나는 죄 없는 내 머리를 뜯었다.. 출연 빈도는 적지 않지만 역할의 행위에 비해 탈락되는 존재들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고, 툴툴거리며 끄적인 글.

PS. 둘 다 할인 쿠폰 없이 봤으면 땅을 찧고 오 천 억 리터 눈물 쏟아냈을 것..


<명탐정 코난>의 아무로 토오루 급으로 운전 실력이 뛰어난 준(민정 첫 째 딸)은 좀비들 사이에서 한정석을 구출하지만, 민정에게 “엄마 말 안 듣냐”며 야단을 맞고, 유진(민정 둘 째 딸)은 장난감 자동차를 이용해 좀비의 동선을 유도하여 한정석 구출에 함께 하지만, 준은 민정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유진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차에 타지 말 것을 명령한다. 권력자는 피권력자에게 설명도 설득도 하지 않고 금지를 통보하고, 복종을 요구한다. 이는 개인들이 권력을 갖는 곳도 있고 갖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영화 전반의 맥락에서 준과 민정의 위치를 보여줄 뿐이다. 이들의 모습은 능력대로 평가받지 않고 어린 존재로서의 이미지만을 갖는다. 그들의 능력과 행위는 ‘어른’들이 보면 “위험한 짓 하면 안되지!”라고 꾸중을 듣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준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해맑고’, 귀엽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표현되기만 한다. <반도>에서 어린이・청소년은 ‘어른’과 함께 힘을 합쳐 좀비 사회에서 탈출하는, 정당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화룡점정은 막판에 강동원이 유진을 안고 뛰는 씬이 아닐까. 이들은 조력’도’ 할 줄 알지만, 결국엔 어른(한정석)에게 의존하여 안겨서 안전해진다.


어린이・청소년 개개인을 집단적 범주의 이미지로만 접근할 때 딸려가는 서사 장치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가족주의, 어린이/청소년다움, 보호주의 등이 그것이다. <반도>는 가족주의 코드를 사용함으로써 가족을 신화화 하는 기존 이데올로기를 통해 관객의 눈물을 쥐어짠다. 전형적인 한국 가족(?) 영화다. 영화 후반부에서 노인은 죽어가면서도 준과 유진을 향해 ”지옥에서 나가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준은 “가족이 함께 있었으니 지옥이 아니었다” 같은 말을 한다. 국가가 기능을 상실하고 한 나라의 모든 곳이 폐허가 됐음에도, 당장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준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가족이 함께라 지옥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거야말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환상이다. 날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결국 가족은 사랑을 유지하는 공동체로 남고, 어린이・청소년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그것을 강화하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를 증명해주는 존재로서 어른의 시선과 욕망이 투사된 타자이다. 마지막에 UN 헬기 타고 구출자와 준의 대화에서 구출자가 이제 괜찮다느니 어쩌고 하는데, 준은 이전에도 나쁘지 않았다던가 행복했다던가 라고 말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음) 이와 같이 온갖 불행 속에서도 어린이・청소년이 가족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판타지는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는 지배 문화와 담론에 중요성을 부여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보호주의와 맥을 함께 한다. 노인은 좀비 생성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또한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위의 대사에 이어서 “이런 세상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가 어린이를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특정한, 전형적인 보호주의 시선이다. 이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읽히기에 ‘미안함’을 느끼는 대상이 되며 ‘어른’과 함께 싸워나가는, 동등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서 관객들의 눈물 쥐어짜게 하려는 배경음이 흘러나오는데, 정말이지 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좀비 영화도 전형적인 가족주의, 보호주의 영화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 살아있다>와의 최악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웃긴 건 악역들의 차창을 부수고 그들을 죽이던 좀비들이 민정 가족의 따뜻한 마음씨와 서사에 감동했는지 이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비꼬는 거임) 좀비들은 차 안에서 자신의 목에 총을 겨누고 죽으려고 하는 민정의 모습을 하나도 가리지 않고, 차창을 깨부수지도 않는다. 좀비들이 일관성 없는 건지 그냥 일을 안하는 건지, 취사 선택해서 사람 죽이는 게 <# 살아있다>와 똑같다. 덕분에 엄마 죽지 말라고 ‘자식들’이 외치고, 민정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리에 총을 맞았음에도 차에서 빠져나와 무수한 좀비떼들을 뿌리치고 (한정석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사히 함께 탈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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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과 일본어

끄직끄직 / 2020. 3. 26. 15:41

한남들은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십중팔구 본인이 ‘야동’을 자주 보는 걸 티내면서 “辞めて(야메테) 그만해”, “痛い(이타이) 아프다”라는 말을 한다. 흔히 누군가 다른 나라 말에 대해 안다고 말하면 기본 인사나 일상어에서 시작하지만, 한국 남성들에게 일본어는 ‘야동’의 말에서 시작한다. 그게 한국 남성의 일상이기 때문이겠지. 남성의 시선을 재/생산하고, 여성을 과장되고 파편화된 성적 기호로 소비하는 ‘야동’은 한국남성에게 이미 가까운 나라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리잡았다.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근거로 폭력을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형태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웃으면서 본인이 아는 일본어가 “야메테”, “이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일본의 관련 산업에서 여성 배우가 촬영장에서 폭력을 당하는 구조, ‘야메테’, ‘이타이’는 촬영 중단을 요구하는 말인데 그 말을 촬영 도중 대사로 바꾸는 현실을 알리는 영상을 보았다. 여성이 인격체일 수 없는 현실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되는 나날들이라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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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것.

동성동본금혼과 호주제 폐지를 목적으로 했던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은 여성운동을 포함한 진보 진영에서 가족이라는 틀 안의 권력의 비대칭성을 가시화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을 받아야만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누구의 성도 따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 역시 이 이야기에 고려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성만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권력의 문제이듯, 성을 거절할 수 없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바꾸기 어려운 (물론 태어났을 때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식’의 위치 역시 성과 이름이 갖는 권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만의 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두 쪽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어느 쪽의 성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과 이름이 갖는 권력의 문제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틀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부모’가 물려주거나 지어준 것이라 하더라도 ‘자식’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쉽게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법적인 이름을 평소에 쓰지 않으려고 하고,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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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자식’

끄직끄직 / 2019. 8. 31. 19:02

‪-작년 글 토대로 다시 적음

작년 이맘 때쯤 있던 일. 특정 청년 활동가에 대해 어느 교사가 “엄마 아빠가 그러니까 (활동하니까) 자식도 잘한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그 교사는 그 발언에 전제된 확고함이 얼마나 ‘자식’이라는 당사자를 단순히 친권자 및 보호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로만 생각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당사자가 하는 운동에서 그들의 삶과 목소리의 중요도를 낮추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칭찬으로 생각하며 평가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해당 발언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저러니까 자식도 저 모양이다”라는 저평가와 다르지 않다. 가족 구성원 간의 상호 행위와 관계는 무시되고, ‘자식’은 친권자 및 보호자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일 수 없으며, 받는 존재로서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식’이 가족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법적 가족의 틀로부터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근대가족이라는 혈연성에 기반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을 해오는 사람들이라도 가족이라는 관계망 속에서 시간을 누적해온 경험이 있는 이상 그 영향을 온전히 0으로 만들 수는 없다. 또한 여기서 간과되어서 안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구성되어온 공간은, 대부분 그렇듯 그 안의 사정들은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능력, 결과를 가족과 연결하여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정 개인이 하고 있는 운동 및 활동 대한 평가와 영향을 말하고 싶다면 섣부르게 가족과 연결짓는 말이나 하는 시간에 그 개인을 만나 당사자의 고민이나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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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일반적 존재로 여겨지지 않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상들은 거절, 혹은 특별한 환영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들은 일상적인 환대를 경험하지 못하기에 주로 기피, 거부의 시선을 받아내는 맥락 속에 살아가고, 특별히 환영되는 시혜적 반응들에 엮여진다.

특정 집단에 대한 접근의 통제 및 규제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누군가 그 집단들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고 허락하는 행위를 특별화 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해주는 것마냥 착한 지배층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스키즈존’도 그렇다. 애초에 ‘예스키즈존’이라며 어린이의 접근을 허락하고 수용한다는 말은 ‘노키즈존’이라는 다른 항의 유표로서만 가치를 갖는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있기에 ‘예스키즈존’이 성립되는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공간의 접근권을 막는 문화가 없는 곳에서 어린이가 접근 가능한 공간에 대해 굳이 ‘예스키즈존’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그것도 ‘허락한다면서’ 말이다. 이는 ‘예스어덜트존’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으른은 공간에 대한 접근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굳이 출입 가능을 통보받지 않으며, 그렇기에 ‘허락’(시혜) 받을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접근 금지가 혐오이듯, 특정 대상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는 말들 역시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승낙이라는 시혜적 감성이 전제된 언어 및 문화는 계속해서 대상이 예속적 존재로 있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이 있으니 예스키즈존은 어린이 접근 가능성을 알리는 것 아니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이어야지 “우리는 너네가 들어오는 걸 허락해줄게”라는 차원이 되어선 안된다.

접근을 허락받는 대상은 불허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렇기에 노키즈존의 해결은 예스키즈존이 아니라 노키즈존을 없애는 것이다. 어린이의 공간 접근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노키즈존 이후의 ‘예스키즈존’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예스키즈존’을 외치며 본인들이 특별히 어린이와 ‘공존’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착한 으른 뽕에 취해있는 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어린이는 으으른의 선의 속에 공존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존재로, 사회 속에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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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7일 작성

성소수자 커뮤니티, 단체, 행사 등에서 청소년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해 왔던 사실들은 청소년운동단체 및 활동가들에 의해 오랫동안 문제제기를 받아왔다. 예를 들면,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애프터파티에 대한 청소년 참여 금지, ‘대놓고 야반도주’에 대한 술판매 금지, 세빛섬에서의 청소년 입장 금지, 보지풀빵에 대한 청소년 관람 및 접근 금지 등 청소년을 배제하는 행사를 구성하고 진행해왔다. 이에 청소년운동단체들은 단체 성명을 내고, 개인활동가들은 조직위 구성원들과 논쟁을 이어왔다. 그런데 여전히 조직위는 청소년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문화/ 관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허구한 날 자신들이 말하는 ‘소수자 인권 보장’에 대한 운동적 가치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청소년 출입을 금지할 의도는 없다고? 후원주점은 주류판매업소를 빌려서 진행되니 청소년 접근 제한은 당연하다며 본인들만 특별히 이러는 거 아니라는 식의 말을 보면, 의도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조직위는 실제적으로 청소년의 접근 및 참여의 금지를 인지했기에, 이것은 의도된 것이 맞다. 현행법은 준수해야겠고, 술은 필요하니 당연히 청소년의 참여가 후순위로 밀린 거겠지. 만일 청소년의 참여가 우선시 됐더라면, 후원 ‘주점’이 빠지고, 술이 없는 후원행사가 열렸을 것이다. 아마 그것만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말할 수 있으면서 현행법도 어기지 않는 방법일테니까 말이다. ‬

‪그런데 법을 못 어기겠으니 술을 빼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뺀다고? 술을 못 잃고 청소년을 막는 것이 ‘배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만약 주류판매업소‬ 접근 제한이 성별이나 인종, 장애 등을 근거로 이루어진다면, 조직위는 그 대상들에 대한 접근 금지, 참여 배제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할 것인가? 조직위가 “사회적으로 주류판매업소에 대한 청소년의 접근권을 막고 있는 것이 의례이고, 규범적 문화인데 (우리만 특별히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굳이 청소년의 접근을 막는다는 공지를 올리냐”라는 식으로 내뱉은 말은 청소년을 차별하고 배제해온 사회문화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직위가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고 어색해보일 수 있다”라는 속편한 걱정이나 할 때, 청소년들은 그 운동에 연대할 수 없는 존재로 밀리며, 친권자 및 보호자를 통해 인증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취한다.

조직위는 행사에 대한 청소년의 접근 및 참여에 장벽을 계속 세우면서 제대로 된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청소년 참여 보장을 외치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라. 자꾸만 법을 핑계대며 배제의 정치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법이 어떻든, 결국엔 어쨌든 그것을 지켜내는 사람들로 인해 배제는 이루어진다.






이후 ‘[알림]사과’에 대하여
:

이런 글을 접하게 되어 유감이다. 오랫동안 서울퀴문축 조직위는 청소년 배제와 차별에 관해 문제제기를 받아왔는데 일관되게 반성과 성찰의 의지를 보이지 않아 와서인지 제대로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사과’에는 굳이 후원주점에 대해 수식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많은 시민단체들이 후원행사를 열어온 주점’을 언급하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같은 말들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이 사과할 때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후원행사를 열어온 단체들이 있음에도 “전례를 따른 것뿐”이라며 조직위는 청소년 배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면피 해왔다. 이번 메일 답장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본인들이 부족했다고 쉽게 인정하긴 커녕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사과인가? 거기다 문제제기 받은 행동들에 대해 본인들만 특별히 그러는 게 아니라는 말들을 섞음으로써 억울해하는 것 같은데, 서울퀴문축 조직위만 청소년을 배제해온 것이 아니면 서울퀴문축 조직위는 그 잘못으로부터 면책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본인만 특별히 잘못한 일이 아니더라도 본인의 잘못 자체만을 가지고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아시라.

물론, 후원행사 당일에 다른 조치를 취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직위는 사전에 청소년 출입 조건에 대한 공지를 띄워달라는 요청을 메일로 받았고, 그 답장에 사과 한 마디 없이 본인들은 "금지할 의도 없지만 현행법 상~" 웅앵웅 하며 공지를 띄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메일 답장에 대한 사과는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수나로 논평에 관해 "지적된 부분에 동의하고 동감"한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조직위가 만약 아수나로 논평의 지적에 동의했다면, 이전의 개인의 요청 역시 무겁게 받아들이고 사과를 했어야 맞다. 그래야 '동의'나 '공감'에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직위가 청소년 배제와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닌데 아직도 '사과'가 이 정도 밖에 안된다니 새롭게 환장하겠다. 그런데 “여타 행사의 기획 시 청소년 참여의 장을 확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노력하겠다는 건지;; 정말 믿음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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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 남성 연예 기획사인 쟈니스 사무소의 쟈니 키타가와가 그제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쟈니가 과거 사무소에 소속한 남성 어린이에 대해 엄청난 성폭력을 저질러왔고, 그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고발한 출판한 서적이 많은 것까지 알게 됐다. 서칭했는데 80년대부터 해서 7권 넘음;;;


그런데 쟈니가 죽은 이후 ’위대했다!’, ‘고마워!’, ‘ㅇㅇ(그룹명) 만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같은 트윗이 엄청 많이 보이며, ‘일본이, 의외로, 죽으면 전부 면죄를 쉽게 한다’라고 문제제기 하는 어떤 일본인의 트윗을 읽게 돼서 한국어와 일본어로 관련 반응과 자료들을 좀 찾아봤는데 진짜 대박.. 일본 언론들은 쟈니가 소속사 남성 어린이들을 성적 학대한 걸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에 남성 아이돌 문화를 전파시킨 공로에 치사하는 기사 밖에 안 내놓는다. 그러다 2004년 2월에 일본 최고재판소가 쟈니의 동성 성폭력 행위 사실을 인정했다길래 옛날 기사 훑으려는데, 안 보임. 안 나옴. (심지어 재판소 홈페이지도 들어갔는데 안 나옴...) 기사들 찾아보니 당시 미디어 각 사에서 보도 안 했다고 전해지고 있더라. 얼만큼 크면 이렇게까지 통제가 잘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언론사들은 너무 깨끗했음. (<아사히 신문>이 <주간문춘>과의 소송을 짧게 다룬 것만 찾음) 영화 <스포트라이트> 생각났을 정도였다.


링크의 기사에 따르면, 2004년 2월에는, 99년에 일대 캠페인으로 쟈니가 동성 성폭력과 아동학대를 고발한 <주간문춘>을 쟈니스사무소와 쟈니가 제소해서 시작된 재판이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재판 중에는 실제로 쟈니에게 성폭력을 당해왔다는 (전) 쟈니스 주니어 멤버가 증언대에 서서 법정에서 쟈니와 싸웠던 것이 큰 화제가 됐다고. 그 결과 제1심에서 쟈니스가 승소했지만, 제2심에서는 동성 성폭력 행위가 사실로 인정되었고, 쟈니스는 상고했지만, 이것은 기각되었다. 그래서 재판소가 다시 동성 성폭력 행위에 관한 주요 부분을 진실로 인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춘 측이 지급한 손해 배상액은 1심 880만엔이서 120만엔으로 감액되었음. 명예훼손이 인정되었지만, 일본 안에서 동성 성폭력이 재판소에 의해 사실로 인정됐다는 사실을 중대한 것으로 봤고, 당시 쟈니를 규탄하는 기운이 높아지는 걸 당연한 흐름으로 봤지만 뉴스, 와이드쇼는 이 재판 결과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함. 결국 쟈니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비판받지 않고 아무런 사회적 제재도 받지 않은 채 권력과 영향력을 보존하여 이어갔다고.

(위 내용은 위의 링크를 번역/ 해석함. 근데 사이트가 신뢰도 보장받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다른 자료들 더 뒤져봐야 할 듯.)

(출처: https://www.cyzowoman.com/2018/08/post_199702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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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이어서 적어야지.

가족의 필연성에 대한 짧글

 

‪우에노 치즈코는 일전에 논문에서 자발성과 선택성이 잘 보이는 방향의 배경에서 가족의 절대성에 대한 환상이 강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가족 정체성에 대한 개인의 환상과 자신을 이 세상에 내보낸 필연에 대한 근거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논지했다. 필연이란 '다른 양상일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유의 반대의 것이며, 필연을 선택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필연은 그대로 자유롭게 전환한다고 한다.

원(元)가족, 혹은 법적 가족 등의 필연이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바꿀 수 있다면, 6년 전 탈가정한 나는 가족 규범이 비급된 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끔씩 ‘모부의 집에 들르는 것이 과연 선택인가? 온전히 벗어나지 못 한 것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비청소년이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자식’에게 온전한 자유는 없다), 여전히 법적인 가족과 연결고리가 있는 모습을 보니 그들 속에서 나는 ‘필연’으로 인식되는 존재로 드러나지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내가 청소년기에 탈가정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법적 가족이 쫓아오는 것을 최대한 차단할 수 있었다. 보다 철저하게, 등본을 떼면 주소지 확인이 가능하니, 일부러 매번 주소지 이전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하는 거 알지만, “엄마가 딸이 어떻게 사는지 확인도 못 하냐”라며 집 앞으로 찾아올 모친이 머릿속에 너무 잘 그려져서 못 했다. 법과 제도는 법적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만들고, 필연이라는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탈가정을 하는 많은 청소년들은 다시 원래의 살던 곳으로 보내지거나 되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사자는 가족을 안전하게 느낄리가 없으며, 오히려 벗어나기 힘든, 억압적 관계로 뚜렷하게 인식하고, 자유의 상실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필연의 반대가 자유라면, 주어진 가족을 ‘다시 선택하고(버리는 것도 선택이다)’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친권자 및 보호자에게 독점되고, 사회경제적으로 고립된 위치의 청소년에게는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청소년은 가족 구성권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으며, 법은 청소년에게 필요한 보호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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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1

끄직끄직 / 2019. 6. 23. 22:24

‪어느 소설 제목이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호모이지 내가 아니다>라는 걸 보고, 너무 읽어보고 싶어서 엄청 웃었다ㅋㅋ 사실 ‘부녀자(腐女子)’의 여성 혐오적 특성들에 관해서 걱정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성 집단을 미화하고 남성 집단 속 남성을 정당화하며, 기존 젠더 관계를 공고히 하는 공범 관계로 이어져왔기에, 이런 소재들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의 흐름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제한적이겠지만, 호모 소셜과 동성애의 연속성을 은폐해왔던 것들이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걷혀지기도 한다는 점을 확인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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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글



무슨무슨 ‘부모’모임은 이성애 부부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배타적 용어라는 점에서도 꺼림칙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부모’는 ‘자식’의 문제라면 무엇이든 관여 가능하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강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더 꺼림칙하다.

왜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식’에 대해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날까? 그들의 언행, 폭력성, 꼰대질 등에 대해 고민하며 만들어진 자식 모임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혈연 중심의 ‘부모’는 지나치게 ‘자식’을 알아야만 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들만이 ‘가족’ 관계에서 ‘문제 해결사’가 된다. 물론, 비슷한 문제나 처지에 고민을 갖고 있어 함께 나누고 싶은 ‘부모’모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 ‘자식’ 이야기를 하는 이상, ‘자식’의 동의와 허락이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개는 그렇지 않은 걸로 안다. “내 자식인데 말도 못 하냐”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가족’이 친밀한 유대 관계라고 하기 보다 혈연에 의한 부모-자식 간의 귀속적 관계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 아닌지.

그들은 과연 ‘자식’들이 본인들의 언행, 폭력성, 꼰대질 등등에 관해 고민해서 ‘자식 모임’을 차리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자신들 입장과 고민들은 모임의 결성 조건이 된다고 보지만, 반대는 그다지 생각 못 할 것이다. 그래서 가끔 상상한다. 친권자 및 보호자들이 고민이라 결성되는 ‘자식 모임’을. 하지만 도중에 상상을 포기한다. 나오는 이야기들이 너무 가관이라 혼돈 대잔치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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