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섹스는 반드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끄직끄직 / 2019. 6. 13. 15:25
- 예전에 썼던 거 바탕으로 수정함
-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여서 금방 썼다.
성과 섹스는 반드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섹스는 종종 대화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로 등장하곤 하며, 어떤 남성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섹스 하자고 보채곤 한다. 성병 예방과 피임을 위해 쓰이는 콘돔은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로 표현되곤 한다. 왜 이렇게 성과 섹스는 '사랑'과 질긴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등 각종 텍스트 속에서 재현되는 섹스는 대개 성애적 관계에 의한다. 모로가도 섹스만 하면 된다는 BL물에서 첫 만남이 나쁜 주인공들이라도 결국엔 성애적 관계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성에 반드시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직장 내 성폭력, 스쿨미투, XX계 성폭력 문제들에서 봐왔듯, 성은 구속, 위압, 강압, 착취 등 다양한 위치를 취한다. 성에는 성애도 성폭력도 있으며, 성이 반드시 친밀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이 생각을 못 하는 사람들이 성폭력 사건들 속에서 성폭력 관계를 성애적 관계라 우기며 2차 가해 행동을 한다.
성이 다양한 위치를 취한다고 할 때, 애정이 있는 관계가 있다면 애정이 없는 관계도 당연히 존재한다. 성폭력 관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애정이 없는 섹스의 예로는 원나잇과 같은 관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개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시 되고, 몸을 함부로 대하는 거라고 판단되는 경향들이 있다. 사랑이 전제된 성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성에는 사랑이 필요할까? 이의 역사적 계보를 훑어온 것이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이다. 연애 결혼은, 연애가 가족과 계급 질서를 방해하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고, 사회 안정을 위해 결혼에 맞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연애는 통제되어 제도 속으로 편입되고, 근대 가족은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를 통해 '연애-결혼-성'의 연결된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위 삼위일체는 이성애만을 거두어들이면서 결혼을 통해 연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바꾸어 말하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관계를 배제하고, 결혼을 통한 임신과 출산만을 환영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천대한다. 결혼은 사회 속에서 생식을 담당하기에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하지 않는다면 삼위일체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곳에 결혼도 사랑도 하지 않는 섹스가 반겨질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혼자서 섹스(자위)하는 것을 사적인 섹스, 상대와 섹스하는 것을 공적인 섹스라 말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주구장창 떠드는 것은 공적인 섹스이다. 상대가 있는, 공적인 섹스는 관계의 문제이기에 상호 합의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고, 몸의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할 때, 애정이 없는 관계에서 섹스를 한다고 해도 몸을 함부로 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느낌이 안 난다며 콘돔을 쓰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들이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안타깝게도 사랑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섹스는 사랑이라 의미가 부여되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섹스는 결과적으로 '걸레'를 포함한 '더러운' 것이 된다. (성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애정 밖의 관계에서 섹스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 중 하나로 생식을 제외한 성과 섹스는 필요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성-사랑-결혼 이라는 트리니티에서 성욕만을 해소하는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애시당초 성과 섹스는 날씨 이야기하듯 공공연하게 이야기될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타인의 성적 쾌락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성욕은 대화의 소재로 자리잡아선 안 되는, 부끄럽거나 민망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성별에 따라 다른 문화와 평가도 있다) 성욕의 통제만을 위한 관계는 더더욱 떳떳하지 못 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적 욕망의 해소를 위한 관계가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선택한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알려져서는 안 되거나, 알리더라도 몰래 알리는 게 맞다고 이야기 된다. 대형 범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때 도덕적 잘못이라며 연애와 결혼 상대에게는 알릴 수 없지 않느냐며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섹스는 사랑하는 이와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윤리적 규범은 성욕만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를 끌어내리기 위해 성욕이 개개인 스스로가 갖는 몸을 통제할 권리 속에서 이야기되지 않도록 한다.
상대를 성적인 대상/ 도구로 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섹스가 서로 상대로부터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합의된 것이라면, 그것의 관계의 구도는 애정이 없는 사이든 (애정이 있다고 여겨지는) 연애하는 사이든 결혼한 사이든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적인 존재로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대상/ 도구화가 문제로 논의될 이유가 없다. 성의 도구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애정의 정도나 유무가 아니라 합의와 상호 존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연애를 하는 관계든 결혼한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합의 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섹스가 성폭력이고 문제이지, 사랑이 없는 섹스는 잘못이 없다.
-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여서 금방 썼다.
성과 섹스는 반드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섹스는 종종 대화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로 등장하곤 하며, 어떤 남성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섹스 하자고 보채곤 한다. 성병 예방과 피임을 위해 쓰이는 콘돔은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로 표현되곤 한다. 왜 이렇게 성과 섹스는 '사랑'과 질긴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등 각종 텍스트 속에서 재현되는 섹스는 대개 성애적 관계에 의한다. 모로가도 섹스만 하면 된다는 BL물에서 첫 만남이 나쁜 주인공들이라도 결국엔 성애적 관계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성에 반드시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직장 내 성폭력, 스쿨미투, XX계 성폭력 문제들에서 봐왔듯, 성은 구속, 위압, 강압, 착취 등 다양한 위치를 취한다. 성에는 성애도 성폭력도 있으며, 성이 반드시 친밀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이 생각을 못 하는 사람들이 성폭력 사건들 속에서 성폭력 관계를 성애적 관계라 우기며 2차 가해 행동을 한다.
성이 다양한 위치를 취한다고 할 때, 애정이 있는 관계가 있다면 애정이 없는 관계도 당연히 존재한다. 성폭력 관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애정이 없는 섹스의 예로는 원나잇과 같은 관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개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시 되고, 몸을 함부로 대하는 거라고 판단되는 경향들이 있다. 사랑이 전제된 성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성에는 사랑이 필요할까? 이의 역사적 계보를 훑어온 것이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이다. 연애 결혼은, 연애가 가족과 계급 질서를 방해하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고, 사회 안정을 위해 결혼에 맞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연애는 통제되어 제도 속으로 편입되고, 근대 가족은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를 통해 '연애-결혼-성'의 연결된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위 삼위일체는 이성애만을 거두어들이면서 결혼을 통해 연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바꾸어 말하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관계를 배제하고, 결혼을 통한 임신과 출산만을 환영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천대한다. 결혼은 사회 속에서 생식을 담당하기에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하지 않는다면 삼위일체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곳에 결혼도 사랑도 하지 않는 섹스가 반겨질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혼자서 섹스(자위)하는 것을 사적인 섹스, 상대와 섹스하는 것을 공적인 섹스라 말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주구장창 떠드는 것은 공적인 섹스이다. 상대가 있는, 공적인 섹스는 관계의 문제이기에 상호 합의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고, 몸의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할 때, 애정이 없는 관계에서 섹스를 한다고 해도 몸을 함부로 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느낌이 안 난다며 콘돔을 쓰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들이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안타깝게도 사랑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섹스는 사랑이라 의미가 부여되고,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섹스는 결과적으로 '걸레'를 포함한 '더러운' 것이 된다. (성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애정 밖의 관계에서 섹스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 중 하나로 생식을 제외한 성과 섹스는 필요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성-사랑-결혼 이라는 트리니티에서 성욕만을 해소하는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애시당초 성과 섹스는 날씨 이야기하듯 공공연하게 이야기될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타인의 성적 쾌락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성욕은 대화의 소재로 자리잡아선 안 되는, 부끄럽거나 민망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성별에 따라 다른 문화와 평가도 있다) 성욕의 통제만을 위한 관계는 더더욱 떳떳하지 못 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적 욕망의 해소를 위한 관계가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선택한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알려져서는 안 되거나, 알리더라도 몰래 알리는 게 맞다고 이야기 된다. 대형 범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때 도덕적 잘못이라며 연애와 결혼 상대에게는 알릴 수 없지 않느냐며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섹스는 사랑하는 이와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윤리적 규범은 성욕만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를 끌어내리기 위해 성욕이 개개인 스스로가 갖는 몸을 통제할 권리 속에서 이야기되지 않도록 한다.
상대를 성적인 대상/ 도구로 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섹스가 서로 상대로부터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합의된 것이라면, 그것의 관계의 구도는 애정이 없는 사이든 (애정이 있다고 여겨지는) 연애하는 사이든 결혼한 사이든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적인 존재로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대상/ 도구화가 문제로 논의될 이유가 없다. 성의 도구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애정의 정도나 유무가 아니라 합의와 상호 존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연애를 하는 관계든 결혼한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합의 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섹스가 성폭력이고 문제이지, 사랑이 없는 섹스는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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