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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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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반도>를 중심적으로 비판하고, 중간에 <# 살아있다>를 끼워서 같이 비판함.



최근 개봉한 한국 좀비 영화 <# 살아있다>, <반도> 모두 봤고, 보는 동안 침잠하게 있고 싶었지만 좆같은 기분을 씻을 수 없어 결제한 스스로를 탓하며 상영 중에 나는 죄 없는 내 머리를 뜯었다.. 출연 빈도는 적지 않지만 역할의 행위에 비해 탈락되는 존재들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고, 툴툴거리며 끄적인 글.

PS. 둘 다 할인 쿠폰 없이 봤으면 땅을 찧고 오 천 억 리터 눈물 쏟아냈을 것..


<명탐정 코난>의 아무로 토오루 급으로 운전 실력이 뛰어난 준(민정 첫 째 딸)은 좀비들 사이에서 한정석을 구출하지만, 민정에게 “엄마 말 안 듣냐”며 야단을 맞고, 유진(민정 둘 째 딸)은 장난감 자동차를 이용해 좀비의 동선을 유도하여 한정석 구출에 함께 하지만, 준은 민정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유진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차에 타지 말 것을 명령한다. 권력자는 피권력자에게 설명도 설득도 하지 않고 금지를 통보하고, 복종을 요구한다. 이는 개인들이 권력을 갖는 곳도 있고 갖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영화 전반의 맥락에서 준과 민정의 위치를 보여줄 뿐이다. 이들의 모습은 능력대로 평가받지 않고 어린 존재로서의 이미지만을 갖는다. 그들의 능력과 행위는 ‘어른’들이 보면 “위험한 짓 하면 안되지!”라고 꾸중을 듣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준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해맑고’, 귀엽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표현되기만 한다. <반도>에서 어린이・청소년은 ‘어른’과 함께 힘을 합쳐 좀비 사회에서 탈출하는, 정당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화룡점정은 막판에 강동원이 유진을 안고 뛰는 씬이 아닐까. 이들은 조력’도’ 할 줄 알지만, 결국엔 어른(한정석)에게 의존하여 안겨서 안전해진다.


어린이・청소년 개개인을 집단적 범주의 이미지로만 접근할 때 딸려가는 서사 장치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가족주의, 어린이/청소년다움, 보호주의 등이 그것이다. <반도>는 가족주의 코드를 사용함으로써 가족을 신화화 하는 기존 이데올로기를 통해 관객의 눈물을 쥐어짠다. 전형적인 한국 가족(?) 영화다. 영화 후반부에서 노인은 죽어가면서도 준과 유진을 향해 ”지옥에서 나가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준은 “가족이 함께 있었으니 지옥이 아니었다” 같은 말을 한다. 국가가 기능을 상실하고 한 나라의 모든 곳이 폐허가 됐음에도, 당장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준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가족이 함께라 지옥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거야말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환상이다. 날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결국 가족은 사랑을 유지하는 공동체로 남고, 어린이・청소년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그것을 강화하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를 증명해주는 존재로서 어른의 시선과 욕망이 투사된 타자이다. 마지막에 UN 헬기 타고 구출자와 준의 대화에서 구출자가 이제 괜찮다느니 어쩌고 하는데, 준은 이전에도 나쁘지 않았다던가 행복했다던가 라고 말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음) 이와 같이 온갖 불행 속에서도 어린이・청소년이 가족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판타지는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는 지배 문화와 담론에 중요성을 부여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보호주의와 맥을 함께 한다. 노인은 좀비 생성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또한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위의 대사에 이어서 “이런 세상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가 어린이를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특정한, 전형적인 보호주의 시선이다. 이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읽히기에 ‘미안함’을 느끼는 대상이 되며 ‘어른’과 함께 싸워나가는, 동등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서 관객들의 눈물 쥐어짜게 하려는 배경음이 흘러나오는데, 정말이지 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좀비 영화도 전형적인 가족주의, 보호주의 영화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 살아있다>와의 최악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웃긴 건 악역들의 차창을 부수고 그들을 죽이던 좀비들이 민정 가족의 따뜻한 마음씨와 서사에 감동했는지 이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비꼬는 거임) 좀비들은 차 안에서 자신의 목에 총을 겨누고 죽으려고 하는 민정의 모습을 하나도 가리지 않고, 차창을 깨부수지도 않는다. 좀비들이 일관성 없는 건지 그냥 일을 안하는 건지, 취사 선택해서 사람 죽이는 게 <# 살아있다>와 똑같다. 덕분에 엄마 죽지 말라고 ‘자식들’이 외치고, 민정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리에 총을 맞았음에도 차에서 빠져나와 무수한 좀비떼들을 뿌리치고 (한정석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사히 함께 탈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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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과 일본어

끄직끄직 / 2020. 3. 26. 15:41

한남들은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십중팔구 본인이 ‘야동’을 자주 보는 걸 티내면서 “辞めて(야메테) 그만해”, “痛い(이타이) 아프다”라는 말을 한다. 흔히 누군가 다른 나라 말에 대해 안다고 말하면 기본 인사나 일상어에서 시작하지만, 한국 남성들에게 일본어는 ‘야동’의 말에서 시작한다. 그게 한국 남성의 일상이기 때문이겠지. 남성의 시선을 재/생산하고, 여성을 과장되고 파편화된 성적 기호로 소비하는 ‘야동’은 한국남성에게 이미 가까운 나라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리잡았다.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근거로 폭력을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형태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웃으면서 본인이 아는 일본어가 “야메테”, “이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일본의 관련 산업에서 여성 배우가 촬영장에서 폭력을 당하는 구조, ‘야메테’, ‘이타이’는 촬영 중단을 요구하는 말인데 그 말을 촬영 도중 대사로 바꾸는 현실을 알리는 영상을 보았다. 여성이 인격체일 수 없는 현실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되는 나날들이라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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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것.

동성동본금혼과 호주제 폐지를 목적으로 했던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은 여성운동을 포함한 진보 진영에서 가족이라는 틀 안의 권력의 비대칭성을 가시화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을 받아야만 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누구의 성도 따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 역시 이 이야기에 고려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성만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권력의 문제이듯, 성을 거절할 수 없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바꾸기 어려운 (물론 태어났을 때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식’의 위치 역시 성과 이름이 갖는 권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만의 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두 쪽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어느 쪽의 성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과 이름이 갖는 권력의 문제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틀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부모’가 물려주거나 지어준 것이라 하더라도 ‘자식’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쉽게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법적인 이름을 평소에 쓰지 않으려고 하고,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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