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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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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으로 지워야 하는 게 아까워서 올림.
만화 『약속의 네버랜드(約束のネバーランド)』리뷰로 쓰려고 했던 일부.
 
 
엘리트주의를 가리키다
 
GF하우스에서 ‘미래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라며 매일 이루어지던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는 엠마와 노먼, 레이는 각각 우수한 학습능력과 탁월한 운동신경, 뛰어난 두뇌, 지혜로움이라는 설정을 갖는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 『약속의 네버랜드』의 전개는 엘리트주의에 합리성을 부여한다. 테스트의 스코어 고득점이 뇌의 발달 정도로 상징되고, 엠마, 노먼, 레이는 다른 식용아들에게 ‘하우스가 낳은 괴물’로 인지되면서 특별한 존재로 분리된다. 때문에 GF하우스의 탈옥과 도주, 자립에 대한 계획이 머리가 좋은 엠마-노먼-레이(엘리트)의 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문제시되지 않고, 신뢰감을 준다. 똑똑한 그들만이 탈출을 계획하고 조절하기에 적합하며, 탁월한 기술이나 능력과 식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돈이 이자벨라에게서 열쇠를 훔쳐 길다와 숨겨진 방을 다녀온 것이 탈출에 ‘방해’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엘리트들에 ‘의한’ 탈옥이 이루어지는 게 식용아 집단 전체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학급 운영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적합하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학교는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낮은 성적을 받은 학생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차별화하며 객관적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탈옥의 계획에 요구되는 치밀함에 뛰어난 두뇌 설정은 필요하겠지만 탈옥 계획의 소수의 엘리트가 특별한 권한을 갖는 것은 테스트가 서열화의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트주의적 전개는, 탈옥을 진행시키기 위해 엠마와 노먼, 레이가 돈과 길다의 영입을 의논하고, 그들에게 “입양된 아이들은 팔려갔다”라며 거짓말로 협력을 부탁하면서 지적된다. 돈과 길다가 숨겨진 방을 다녀오게 되면서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돈은 엠마 일행에게 “너희들에게 우리는 짐이 된 거냐”,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약자냐”라며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음을 슬퍼한다. 이후 엠마는 그 덕분에 다른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며, 다른 아이들에게도 현실을 이야기하자며 도망가기 위해서도 위험을 알고 탈옥에 가담하는 게 좋을 거라고 노먼에게 말한다. 돈과 길다 역시 테스트의 고득점자라는 점과 엠마와 노먼은 ‘풀스코어(만점)’라는 위치에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모습들은 또 다른 엘리트주의의 양상이지만, 이로써 만화는 핵심적 집단이 되는 엘리트들이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결정권한 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엠마와 레이가 탈옥 과정에서 집단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나치게 지려는 모습들이 다른 식용아들에게 문제제기를 받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문제는 도마 위로 올라온다. 이는 『약속의 네버랜드』의 전개 방식과 관계 속에서 중요하게 읽어져야 할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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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걸캅스>를 포함해 문화 산업 속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에 대해 무조건적 찬미와 무조건적 부정, 두 개의 큰 흐름을 보면 도나 해러웨이가 지적한, 페미니즘이 과학을 물신화한 두 가지 상보적 방식이 생각난다. (물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주인공에 대한 작품은 필요하며 의미 있음) 과학기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과학기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표준적 과학관에 대한 양극단적 시각이라 하는데, 이 둘은 다른 것 같지만 과학적 지식의 구성 과정을 보지 못 하게 함으로써 결국엔 과학기술 지식 자체와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내용이 없는, 블랙박스로 남아있게 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주인공 작품에 대한 무조건적 소비 지향과 그 반대는 내용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막아선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지.

Posted by 두둥 ( ͡° ͜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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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가족 구성의 주체일 수 없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 현실을 확인할 때마다 늘 마음이 무겁다. 어떤 이가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을 언급하는 글을 보게 됐다. 비혈연 중심 가족 구성을 담은 영화라며 혈연 중심 가족에 대한 대안적 가치 어쩌고 하던데 이 영화가 언급될 때마다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 되는 게 솔직히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는 어린이가 가족을 선택할 수 없고, 어른/ 국가가 거두어줌으로써 결국엔 폭력적인 가정이나 시설로 돌려보내지는 구조(현실)를 보여준다. 비혈연 중심의 새로운 가족도 실은 딱한 현실에 처한 어린이를 동정하는 '어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감정을 주고 받고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변함이 없다. 어떤 가족이든 간에 그것의 구성과 해체의 순간 속에 어린이는 주체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적나라한데 혈연에 얽매인 이야기들이 (비혈연도 혈연의 이야기 속에서만 말할 수 있다) 엄청 대단할 수 있는 것일까? 비혈연 중심의 구성체는 혈연 중심의 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 속에서 중요한 재현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빈곤 역시 영화의 중심 요소인데, 동정 속에서만 어린이의 가난이 되물어지는 것들이 너무 단선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과제를, 어린이 인권 침해로 볼 수 있으나 경제적 효과가 없는 존재로 읽혀온 어린이가 가난의 짐을 함께 지며 살아갈 때 도둑질은 생존을 함께 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며 자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운 게 그것 밖에 없더라도 말이지. 그래도 제대로된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며 비혈연 중심의 가난한 가족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난에서도 어린이는 밀려난다고 느꼈다. 어느 곳에도 쉽게 서있을 곳이 없다. 어린이의 생각을 제대로 묻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정해놓고 유도하는 어른/ 사회까지, 영화는 어린이의 위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관에서 울어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떠올리니 또 울컥한다.

Posted by 두둥 ( ͡° ͜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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